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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상 재해를 다투는 소송에서 유족이 가장 크게 낙담하는 순간 중 하나는 진료기록감정 결과를 받아들었을 때다. 진료기록감정이란 법원이 소송 당사자와 무관한 병원의 전문의에게 망인의 의무기록을 보내, 질병의 원인과 업무와의 관련성 등에 관한 의학적 의견을 묻는 절차다. 법원이 선정한 중립적인 전문가의 의견이라는 점에서 소송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감정 결과가 불리하게 나오면 사실상 소송이 끝났다고 여기는 유족도 적지 않다.
그러나 최근 서울행정법원은 두 차례의 진료기록감정이 모두 유족에게 불리하게 회신된 사안에서, 망인의 사망과 업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해 유족급여 불승인 처분을 취소했다(서울행정법원 2026. 7. 23. 선고 판결). 이 판결은 처분 기관이 항소하지 않아 그대로 확정됐다.
법원 선정 전문가 진료기록감정, 소송 큰 영향
망인은 장기간 반복된 과로로 뇌내출혈이 발병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았고, 약 3개월간 치료를 받은 뒤 업무에 복귀했다. 그러나 오래 앓아온 만성신장병으로 매월 진료와 약물치료를 이어가야 하는 상태였다. 복귀 후 망인은 업무와 관련한 분쟁이 잇따르며 상당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었고, 업무 일정 때문에 예정된 정기진료를 받지 못해 열흘 남짓 혈압약을 복용하지 못했다. 그 직후 망인은 근무시간을 넘겨 일하던 중 쓰러졌고, 다시 발병한 뇌내출혈로 사망했다. 처분 기관은 최초 뇌내출혈 발병시에는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지만, 이후 두 번째 발병으로 인한 사망은 업무와 상당인과관계가 없다며 유족급여를 거절했다.
소송에서 진행된 두 건의 진료기록감정은 모두 유족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했다. 신경과 감정의는 업무상 스트레스와 혈압약 중단이 발병에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유보적인 의견을 제시하며 “종합적으로는 업무가 사망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직업환경의학과 감정의는 더 불리했다. 망인의 신장기능은 첫 번째 발병 이전부터 이미 말기 신부전에 가까웠으므로 이후의 악화는 기저질환의 자연스러운 진행이고, 진료를 받지 못했더라도 대리처방이나 인근 병원 방문 등으로 약을 계속 복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법원은 위 감정의들의 의견과 달리 망인의 사망이 업무와 상당인과관계가 있다는 판단을 했는데, 법원이 다른 결론에 이른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법원은 감정의 결론보다 그 내용을 들여다봤다. 신경과 감정의는 신장기능의 악화가 기저질환의 자연경과에 따른 것인지, 별도의 급성 요인에 의한 것인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법원은 이처럼 의학적으로 불확실한 상황이라면, 첫 번째 발병과 그 치료 과정에서 생긴 급성 신손상이 이미 약해진 신장에 추가 부담을 줘 기능 저하를 앞당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봤다. 결국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 첫 번째 발병이 신장기능 악화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두 번째 발병에 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이 상당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둘째, 법원은 감정 의견이 서 있는 ‘전제’를 따졌다. 대리처방이나 다른 병원 방문으로 약을 계속 복용할 수 있었다는 감정 의견은, 그러한 대체수단이 망인에게 실제로 열려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법원은 상급종합병원에서 장기간 관리를 받던 중증 환자에게 대리처방이나 전화진료가 허용되는지는 의료기관의 운영기준과 담당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달라지고, 다른 병원에서 같은 약을 임시로 처방받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했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고 봤다. 전제가 되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은 이상 그 위에 선 감정 의견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셋째, 법원은 ‘치료를 소홀히 한 탓’이라는 처분 기관의 주장과 감정의의 의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망인이 의료진의 투석 권유를 거부했다는 객관적 자료가 없고, 오히려 의료진의 장기 치료계획에 따라 매월 진료와 약물치료를 꾸준히 받아왔다. 진료를 놓친 것 역시 업무상 책임을 우선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공백이므로, 이를 망인의 건강관리 소홀로 평가할 수 없다고 했다.
넷째, 법원은 망인 자신의 건강상태를 기준으로 판단했다. 업무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는 ‘보통의 평균적인 사람’이 아니라 해당 노동자의 건강과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확립된 법리다. 이미 뇌출혈을 한 차례 겪은 망인에게는 같은 정도의 스트레스라도 건강한 사람보다 훨씬 큰 악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이 크다는 것이다.
진료기록감정은 정답이 아니다
유족이 불리한 감정에서 봐야 할 세 가지
이 판결의 의의는 진료기록감정이 소송의 ‘정답’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확인했다는 데 있다. 감정은 법원이 판단에 참고하는 여러 증거 가운데 하나이고 법원은 감정 의견의 근거가 합리적인지, 다른 증거와 들어맞는지를 따져 받아들일지를 정할 수 있다. 특히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는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정을 종합해 업무가 질병의 발생이나 악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추단할 수 있으면 인정된다. 의학이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지점에서 법원이 판단을 멈추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법리가 실제로 작동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판결은 업무상 재해를 한 번 겪은 사람이 다시 쓰러졌을 때, 앞선 재해와 이후의 발병을 단절해 볼 것이 아니라 그사이의 경과를 하나로 이어 살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업무로 인해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한 공백을 노동자 본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는 판단 역시, 기저질환을 가진 노동자의 유족급여 사건 전반에서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비슷한 사정으로 소송을 진행 중인 유족은 아래 내용을 기억하길 바란다.
첫째, 진료기록감정 결과가 불리하게 나왔다고 해서 곧바로 포기할 필요는 없다. 감정서의 표현이 인과관계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인지, 아니면 의학적 불확실성을 밝힌 것에 그치는지 구분해서 읽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감정의에게 추가 질의를 하거나 다른 진료과에 감정을 신청할 수도 있다.
둘째, 감정 의견이 어떤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의학적 판단처럼 보이는 의견도 그 전제가 되는 사실관계가 다르다면 설득력을 잃는다.
셋째, 망인이 꾸준히 치료를 받아왔다는 기록과, 만일 치료 공백이 있었다면 그것이 업무 때문이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를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 이러한 자료는 망인이 건강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핵심 근거가 된다.
의학이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는 영역에서, 그 불확실성의 부담을 고스란히 유족에게 지워서는 안 된다. 업무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는 감정서의 몇 문장으로 판단할 것이 아닌, 망인이 재해 이후 어떤 몸으로 어떤 업무를 감당해 왔는지 그 전체 경과를 들여다봐야 하는 문제이다. 처분 기관 역시 의학적 불확실성을 곧바로 불승인의 근거로 삼는 관행에서 벗어나, 재해를 입은 이의 삶 전체를 살피는 판단 기준을 마련하기를 기대한다.
출처 : 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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